※ 유명인들의 인명별 영어 명언 https://cw2588.blogspot.com
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현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산신씨(靈山辛氏)는 2020년 102,631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93위에 랭크되어 있다.
영월신씨(寧越辛氏)는 2020년 85,100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111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두 신씨 합계는 187,731명이다.
영산 신씨 및 영월 신씨의 시조(始祖) 신경(辛鏡)은 송나라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고, 1138년(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錄大夫 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에 있는 4세 신몽삼의 묘에 영주신지묘라고 되어 있는데,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서는 영주(寧州)는 중국에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지명이라 하며 신씨가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의 감숙성(甘肃省, 간쑤성)을 송나라 때엔 영주(寧州)라고 불렀다.
9세손 신천(辛蕆)이 1294년(충렬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고, 신천의 동생 신혁(辛革)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혁의 손자 신예(辛裔)가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때 신예의 동생 신부(辛富)는 취산군(鷲山君)에 봉해지고, 신돈(辛旽)은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로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辛富의 손자인 신인손(辛引孫)이 세종 때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고, 辛引孫의 아들 신석조(辛碩祖)는 세조 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8세 신지화(辛至和)
9세 신천(辛蕆) → 덕재공파(德齋公派)
9세 신혁(辛革) → 초당공파(草堂公派)
9세 신온(辛蘊) → 부원군파(府院君派) → 영월 신씨(寧越 辛氏)
9세 신한(辛漢) → 판서공파(判書公派) → 영월 신씨
* 8세 신공근(辛恭近)-9세 신성렬(辛成烈)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이 다섯 파 중 덕재공파, 초당공파, 상장군공파는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영산 신씨라 하고, 부원군파와 판서공파는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삼아 영월 신씨라 한다.
공민왕 시대의 영산 신씨 신돈(辛旽)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하려 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이것은 권문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이자 민간경제를 활성화시킬 유일책이었다. 또한 그것은 결과적으로 권문세족(權門世族)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신돈의 개혁정책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의 설치로 구체화했으며, 1366년 5월 신돈이 토지개혁을 주관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압 탓에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는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바로잡는 관청으로서 신돈은 그 총책임을 맡아 농장주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을 본래 신분으로 되돌려주었다. 이로 인해 신돈은 민중으로부터 성인(聖人)으로 칭송받았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부호(富豪)들이 권세를 악용해 강탈한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었고, 권문세족(權門世族)이 불법으로 점유한 농지를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광종 이후 폐지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부활시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과 생계 문제 탓에 노비를 자청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부당하게 권문세족이 착복한 돈을 회수하는 등 국가 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이에 따라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라고 찬양했는데, 노비와 토지를 잃은 권문세족과 귀족을 위시한 양반 계층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고 비방하였다.
1370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보낸 친서에서 공민왕을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相國)으로 부를 만큼 신돈의 위세는 공민왕 못지않게 대단해졌다.
그러나 신돈의 세력 확대는 공민왕에게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권문세족들을 견제하고자 내세운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던 차에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역모(逆謀) 고변(告變)에 휘말려, 신돈은 수원부(水原府)에 갇혀 있다가 1371년(공민왕 20)에 향년 49세로 처형당했다.
역성(易姓) 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儒敎) 세력이 얼마나 역사를 날조(捏造)한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다.
영산 신씨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중광(重光, 시게미츠)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했다.
근세(近世)의 영산, 영월 신씨 유명인으로는 롯데그룹 회장 신격호, 신동빈, 신기하(전 국회의원), 신기남(전 국회의원), 신상우(전 국회부의장), 신정훈(22대 국회의원), 신광옥(전 법무부 차관), 신애라(연예인), 신형원(가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