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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南陽 洪氏) 시조 당홍계(唐洪系) 홍천하(洪天河) 홍은열(洪殷悅) 중시조 홍유(洪儒) 토홍계(土洪系) 홍선행(洪先幸) 조상 본 본관 파 종류 인구수 순위 뜻 한자 한문 유명인 인물 남양홍씨 재신공파(宰臣公派) 예사공파(禮史公派) 중랑장파(中郞將派) 남양군파(南陽君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익산군파(益山君派)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鄭夽甲 2024. 9. 5. 20:09

 유명인들의 인명별 영어 명언 https://cw2588.blogspot.com

 

 

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남양 홍씨(南陽 洪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2015(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 현재 487,488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17위이다.

 

남양홍씨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을 본관으로 삼는 성씨이며,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남양 홍씨 당홍계(南陽 洪氏 唐洪系)와 고려시대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남양 홍씨 토홍계(南陽 洪氏 土洪系)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홍씨는 중국 남방을 다스리던 신()이자 농사, 의학, 약초의 신 염제 신농(炎帝 神農)의 후손으로, 간쑤성 서북부에 있는 둔황(敦煌)이 홍씨가 탄생한 지역이다.

 

처음 홍씨가 탄생한 것은 돈황 지역에 살고 있는 공공씨(共工氏·요순시대 형벌을 다루는 관리)의 후손이 원수의 추격을 피해 공() 자에다 수() 자를 붙여 홍()이라는 성씨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 홍씨가 생겨난 것은 당나라 태종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당나라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에 입국한 것에서 연유한다.

 

고구려에 들어온 홍천하가 연개소문이 일으킨 반란에 반대하며 다시 신라로 건너가 삼국통일 이후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홍씨가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8학사의 실체가 불분명하며 다른 성씨들의 전승과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므로 중국 유래설은 여느 성씨들과 마찬가지로 후대인들이 시조 미화를 위해 지어낸 것이라 봄이 타당할 것이다.

 

남양 홍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보가 있는데, 세칭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다.

 

당홍은 당나라에서 귀화한 홍천하 후손이고, 토홍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이다. 당홍과 토홍이라는 속칭도 이처럼 당나라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한 것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실제로는 모두 한 조상의 관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두 집안의 조상이 비록 달리 내려오나 한 집안으로 보아 통혼하지 않으며, 양 계통은 현재까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당홍의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 27대 영류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 있는데, 현재는 경기도 화성시 서부 일대(서신면, 남양읍 등)이다. 고려 개국공신이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의 손자인 3세 홍란(洪蘭)이 재신공파(宰臣公派)로 나뉘고, 4세 홍복(洪復)이 예사공파(禮史公派)로 나뉘며, 6세 홍후(洪厚)는 중랑장파(中郞將派)로 나뉜다. 7세 홍지유(洪至柔)의 후손들은 13세손에서 13파로 갈리며, 모두 16파로 나뉜다.

 

3세 홍란(洪蘭)  재신공파(宰臣公派)

4세 홍복(洪復)  예사공파(禮史公派)

6세 홍후(洪厚)  중랑장파(中郞將派)

13세 홍주(洪澍)  남양군파(南陽君派)

13세 홍언박(洪彦博)  문정공파(文正公派)

13세 홍언수(洪彦修)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13세 홍운수(洪云遂)  익산군파(益山君派)

 

홍주(洪澍)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가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그중에서 가장 번창한 파는 남양군파로 남양 홍씨 당홍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토홍계(土洪系)의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12세 홍언필(洪彦弼)이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에 가담해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홍언필의 아들 홍섬(洪暹)도 선조 때 영의정을 세 차례나 중임하고 청백리에 뽑혔다.

 

홍언필의 동생인 홍언광(洪彦光)의 아들 홍담(洪曇)은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선조 때 우참찬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홍담의 손자인 홍희(洪憙)는 인조의 이모부로서 익평부원군(益平府院君)으로 추봉되었고, 홍희의 아들인 홍진도(洪振道)는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0세 홍귀연(洪貴演)의 아들 홍숙(洪淑)은 중종 때 좌찬성에 올랐고, 그의 현손인 홍익한(洪翼漢)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11세 홍한(洪瀚)의 증손자인 홍가신(洪可臣)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청난공신(淸亂功臣)에 책록되고, 광해군 때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9세손 홍익생(洪益生)의 아들부터 갈라져 10~12세손에서 5파로 나뉜다.

 

10세 홍귀해(洪貴海)

11세 홍형(洪泂)

12세 홍언필(洪彦弼)  문희공파(文僖公派)

12세 홍언광(洪彦光)  정효공파(貞孝公派)

11세 홍한(洪瀚)  참의공파(參議公派)

10세 홍귀호(洪貴湖)  주부공파(主簿公派)

10세 홍귀연(洪貴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남양 홍씨는 조선시대에 2명의 종묘 배향공신을 배출했다. 당홍계 충정공(忠貞公)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 1428~1492)은 좌의정에 올라 성종의 배향공신이 되었으며, 토홍계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은 인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 배향공신에 올랐다.

 

이밖에는 총 329(당홍 206, 토홍 123)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이는 전주 이씨(884), 안동 권씨(359), 파평 윤씨(336)에 이어 네 번째의 서열이지만 인구 순위를 감안하면 놀라운 강세다.

 

 

근세(近世)의 남양 홍씨(南陽 洪氏) 유명인으로는 남궁원(본명 홍경일, 연예인), 홍정욱(전 국회의원), 홍난파(작곡가), 홍두영(남양유업 창업주), 홍라희(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부인), 홍록기(연예인), 홍사덕(전 국회의원), 홍서범(가수), 홍석천(연예인), 홍수철(가수), 홍수환(전 권투선수), 홍의락(전 국회의원), 홍문종(전 국회의원), 홍문표(전 국회의원), 홍용표(전 통일부장관), 홍준표(대구광역시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