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인들의 인명별 영어 명언 https://cw2588.blogspot.com
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해주 오씨(海州 吳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해주 오씨(海州 吳氏)는 2015년(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 현재 462,704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19위이다.
* 해주오씨 대종회(海州吳氏 大宗會) http://www.hjo.co.kr
* 해주오씨 대동종친회(海州吳氏 大同宗親會) http://www.haejuoh.net
해주 오씨는 중국에서 온 때가 서로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경파(京派), 향파(鄕派) 양쪽 다 본관이 해주(海州)이지만, 다른 집안이다.
-. 해주오씨 경파(京派)
1401년에 작성된 《해주오씨족도(海州吳氏族圖)》에 의하면 시조는 오인유(吳仁裕)이다.
경파(京派)는 고려 성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온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모시는 대종중이며, 海州吳氏族圖를 연원 기록으로 한다.
3,300여 년 전 중국 오씨로부터 고려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보와 내용이 명확하다.
시조 오인유(吳仁裕)는 중국 송(宋)나라의 대학사(大學士)로 984년(성종 3년) 고려에 동래하여(고려말 양평공 오연총 묘지명 내용)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내고 해주(海州)에 정착하였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의 정무공파(貞武公派)와 오윤겸(吳允謙)의 추탄파(楸灘派)에서 특히 많은 인물이 나왔고,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세력이 또다시 크게 늘었다.
오윤겸이 조선 인조조에 영의정에 올랐고, 오윤겸의 현손 오명항(吳命恒)은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으로 우의정에 이르렀다.
오윤겸의 조카가 삼학사(三學士)로 알려진 오달제(吳達濟)이다.
이후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1등 분무공신 오명항(吳命恒)에 이르기까지 경파는 번성을 누렸다.
오정방의 증손 오두인(吳斗寅)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가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다. 오인유의 19세손 오원(吳瑗)과 20세손 오재순(吳載純)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오인유의 후손은 7세를 전후로 30여 개의 파로 나뉘었다.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7세 이조전서 연경(延慶 : ? ~ 1309)
부훤당공파(負暄堂公派) - 14세 오상(吳祥)
계산공파(溪山公派) - 14세 오경(吳慶)
찬성공파(贊成公派) - 8세 오반(吳潘)
사복시정공파(司僕侍正公派) - 9세 오중수(吳仲守)
양정공파(陽亭公派) - 9세 오희(吳僖)
용강공파(龍岡公派) - 9세 오처권(吳處權)
영변공파(寧邊公派) - 9세 오석계(吳碩啓)
생원공파(生員公派) - 9세 오생운(吳生韻)
묘제공파(墓齊公派) - 7세 오사정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 7세 오사운
사복시랑공파(司僕侍郞公派) - 7세 오사렴
전서공파(典書公派) - 7세 오광정(吳光庭)
사인공파(舍人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장춘공파(長春公派)
해성부원군파(海城府院君派)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징사공파(徵士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 해주오씨 향파(鄕派)
신라 지증왕 원년(서기 500년) 오첨(吳瞻)이 중국에서 전라도 해남으로 들어와 함양에서 김종지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22년 후 큰아들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이때 어린 둘째 아들 응(膺)이 너무 어려 남게 되었는데, 이후 오응(吳膺)의 12대손 오광우(吳光佑)가 중국에 들어갔고, 그의 현손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다고 한다.
향파는 오첨(吳瞻)을 시조로, 24세 오현보(吳賢輔)를 중시조로 모시며, 《오씨삼십세계도(吳氏三十世系圖)》(1397)를 연원 기록으로 한다.
1940년 전후로 공개된 '吳氏三十世系圖' 필사본에 근거하면 해주 오씨 향파의 도시조는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吳起)의 45세손 吳瞻이다.
'吳氏三十世系圖' 원본을 근거로 작성된 족보들에는 '오첨은 동방으로 와서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후한 건우 년간에 오첨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고만 되어 있는데, 필사본에는 함양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후한 건우 년간은 서기 947~950년인데 지증왕 원년은 서기 500년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크고, 지증왕 원년 동래설을 최초로 오씨 족보에 반영한 게 1962년 '『오씨대동보(吳氏大同譜)』'이다.
이후 1969년 '오씨원본'도 '오씨대동보'를 따르고 그 후로 대부분의 오씨 족보는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따르나 문제는 시초가 되는 1962년 '吳氏大同譜'가 '吳氏三十世系圖'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응의 9대손 다련군 오희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했으며,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었다고 기록된 데서도 문제가 있다.
장화왕후가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 건 팩트이지만 오응, 오희 등의 존재가 필사본에만 있고 원본에는 없어 조작이 아닐까 의심을 받고 있다.
즉, 송은당(松隱堂) 오탁진(吳卓眞)의 기록을 기초로 한 해주 오씨(향파) 정해보(1767년), 보성 오씨 병술보(1766년), 함양 오씨 족보서(1689년)에는 원래 없던 부분이다.
또한 지증왕 원년은 경진(庚辰)년인데, 필사본에는 신사(辛巳)년으로 되어 있다.
이후 내용은 원본과 필사본들이 같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980년 다시 송나라로 귀국해 그의 현손인 오연총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고,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여진을 토벌해 1114년 추충공신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이 됐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이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이라는 세 아들을 두는데, 이들이 1216년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각각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同福吳氏), 보성 오씨(寶城吳氏)의 시조가 되었다.
향파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많은 현신을 배출하였다.
특히 오윤겸(吳允謙)과 오달제(吳達濟) 등이 유명한데, 오윤겸은 인조반정 후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노서의 영수가 되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달제는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로 유명한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 화의를 반대하였고, 후에 심양(瀋陽)에 끌려가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경파, 향파 두 집안은 각 시조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고증(考證)하기 어려우므로, 별개의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경기도 용인시에 경파 시조단이 있으며, 충남 공주에 향파 시조단이 있다.
문과급제자 숫자나 상신 등 해주 오씨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치들은 두 파를 모두 합한 것이며, 현대 해주 오씨 인구수 역시 합친 것이다.
해주 오씨 경파(약 400,000명), 향파(약 60,000명) 둘이 합쳐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99명, 무과급제자 269명(중시 등 2번 이상 합격자 횟수까지 따지면 298번), 생진사 326명, 역과 56명, 의과 15명, 음양과 2명, 율과 5명, 주학 2명 등을 배출했다.
해주 오씨는 서인 명문가로서 조선 중기 인조~현종~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정승과 대제학, 판서를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소론에서도 탕평파로 들어가면서 당파싸움에 거듭되는 환국에도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지만, 정조 이후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중앙에서 멀어졌다.
근세(近世)의 해주 오씨(海州 吳氏) 유명인으로는 오경환(전 해군참모총장), 오나라(연예인), 오달수(배우), 오세정(전 서울대학교 총장), 오세훈(서울특별시장), 오연서(배우), 오은영(방송인), 오지명(배우), 오혜리(올림픽 테권도 금메달을 수상한 한국체대 교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