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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夽甲 2024. 7. 29. 10:14

※ 유명인들의 인명별 영어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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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초계정씨(草溪鄭氏) 박사공파(博士公派) 소속이며, 시조(始祖)부터 헤아리면 30세손(世孫)이고,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 (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2015년 인구조사 현황(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에 의하면 草溪鄭氏는 104,155명이고, 팔계정씨(八溪鄭氏)라고 불리는 박사공파(博士公派) 17,366명을 합하면 총 121,521명이다.

 

* 초계 정씨 대종회(大宗會) ; http://초계정씨대종회.com

始祖와 어렵게 출생한 2世의 상황을 고려하면, 약 1000년에 걸쳐 후손들이 정말로 많아졌다.

草溪鄭氏의 始祖는 고려 8대 현종(顯宗)~11대 문종(文宗) 시대에 지공거(知貢擧),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中樞院使 翰林學士承旨) 등을 지낸 광유후(光儒侯)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 ?~1051)이다.


경주정씨(慶州鄭氏) 상계(上系) 고증도(考證圖)에 아래와 같이 나옴.

정씨(鄭氏)의 도시조(都始祖) 지백호(智伯虎) 후손
-. 34世 정유천(鄭遊天) -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의 사위. 도관찰사(都觀察使), 안무지휘사(按撫指揮使),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 35世 정현성(鄭玄成, 鄭遊天의 아들) -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금오위 장군(金吾衛將軍), 계림군(鷄林君), 시호(諡號)는 경렬(景烈)

 

-. 36世(鄭玄成의 세 아들이 국왕 주변에서 함께 근무)
* 長男 정심(鄭審) - 판이부사(判吏部事), 경주정씨 문헌공파(慶州鄭氏 文獻公派)
* 次男 정걸(鄭傑) - 예부상서(禮部尙書), 여러 정황상 아들이 없었던 걸로 보임
* 三男 정배걸(鄭倍傑) -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中樞院使 翰林學士承旨), 초계정씨 시조(草溪鄭氏 始祖)

鄭傑이 형 鄭倍傑이 동생으로 형제분이며, 형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근무할 때 동생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형이 비서감 지중추원사(祕書監 知中樞院事)로 근무할 때 동생은 비서감 지중추부사(祕書監 知中樞)로 함께 근무하셨다.


홍문공(弘文公)  鄭倍傑은 사숙(私塾)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들을 당시에는 웅천도(熊川徒)라 일컫다가 弘文公 사후(死後)에는 홍문공도(弘文公徒)라 칭했다.

2世 정간공(貞簡公) 정문(鄭文, 1051~1106)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弘文公의 부인 최씨가 오랫동안 후손을 두지 못하다가, 친정 집안에서 데려온 최씨 혈육을 통해 어렵게 2世를 얻었다.

젊은 최씨 부인이 겨우 임신했는데, 아쉽게도 弘文公은 세상을 떠나고 貞簡公은 유복자로 태어났고 두 최씨 어머니가 2世를 길러 출세시켰으며, 사실은 貞簡公 鄭文이 草溪鄭氏 문중을 열었는데 아버님을 시조로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고려 11대 문종(文宗)은 弘文公이 세상을 떠나자 무척 아쉬워했다고 고려사에 나오며, 불과 15년 만에 그 아들 정문(鄭文)이 아래 글귀를 세상에 알리며 나타나자 정말로 기뻐했다고 한다.

君爲民天賦
(군위민천부)
국왕은 백성의 하늘이어라

物如憔悴 我則施 雨露之恩
(물여초췌 아즉시 우로지은)
만물이 초췌해지면, 나는 곧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베풀 것이고,

俗若頑兇 我則布 雷霆之怒
(속약완흉 아즉포 뢰정지노)
풍속이 사나우면, 나는 곧 천둥과 번개 같은 노여움을 보일 것이다.

鄭文은 11대 문종(文宗)~15대 숙종(肅宗) 시대에 걸쳐 刑部尙書(형부상서), 政堂文學(정당문학), 太子賓客(태자빈객), 禮部尙書(예부상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자선(慈善)과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인물이다.

鄭文의 장남(長男)이 鄭復公(정복공, 1076~1134)이며, 鄭復公의 장남 정영(鄭榮) 후손이 맏이 집안으로 종파(宗派)이고,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이다. 鄭復公의 차남 정행부(鄭幸夫)의 후손은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이다.

鄭文의 차남(次男)이 鄭復卿(정복경, 1087~1152)이며, 이 집안은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이다.

鄭文의 삼남(三男) 鄭復儒(정복유) 집안에서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박사공파(博士公派)가 형성된다.

鄭復儒의 아들과 손자의 산소와 諱(이름 휘, 姓名)가 분실되어 鄭復儒의 증손자 6世 대사성(大司成) 정태화(鄭太華, 1171~1248)부터 시작된 집안이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이다.

박사공파(博士公派)는 4世~6世 산소와 諱가 모두 분실되어 鄭復儒의 고손자(玄孫 현손) 7世 양평공(良平公) 정승(鄭丞)부터 새로 시작되는 집안이고, 博士公派를 팔계정씨(八溪 鄭氏)라고도 한다.

필자의 짐작이지만, 鄭復儒의 아들과 손자 및 증손자 중에서 1170년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시작된 무신 정권에 의해 희생된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된다.

弘文公 鄭倍傑 및 貞簡公 鄭文이 국왕 가까이에서 업무를 보던 관계로, 그때부터 후손들이 조선조 문종대까지 국왕의 주변에 늘 초계 정씨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던 점을 미루어 보건대, 이러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양평공(良平公) 정승(鄭丞)은 국자감(國子監) 박사(博士)부터 시작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전법판서(典法判書, 형부상서)를 거쳐 최종 벼슬은 판도판서(判圖判書, 호부상서)이다.

아마 鄭太華가 鄭丞의 숙부(叔父)일 가능성이 크며, 鄭太華의 부친과 형(鄭丞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흩어져 사는 상황에서 산소와 諱조차 알 수 없어서 鄭丞이 팔계 정씨(八溪鄭氏)로 독립한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초계 정씨에는 크게 5개 분파가 있고, 각 분파마다 사는 지역과 중시조(中始祖)에 따라 아래와 같이 세밀하게 나누어진다.

-.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 대종손파(大宗孫派), 해남파(海南派)

-.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 호희공파(胡僖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 경산종파(慶山宗派), 초계진주파(草溪晋州派), 관동파(關東派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서정공파(西亭公派), 효정공파(孝貞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선전공파(宣傳公派), 수재공파(壽齋公派)

-. 박사공파(博士公派) ; 진정종파(眞定宗派), 장양공파(莊襄公派), 상시공파(常侍公派), 강헌공파(康憲公派, 또는 용인파 龍仁派)

필자의 직계 선조(先祖) 중에 9世 정공연(鄭公衍)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은 [죽부인전(竹夫人傳)]을 지은 가정 이곡(嘉靖 李穀, 1298~1351)과 동갑의 친한 벗이었다고 한다.

이분은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고 아들 3명이 모두 관리로 봉직했는데, 장남 정습상(鄭習常)은 대사성(大司成), 차남 정습충(鄭習忠, 필자의 先祖)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막내 정습인(鄭習仁)은 정3품 정도의 벼슬을 역임했으며, 적극적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실행으로 인하여 신돈(辛旽)이 사형을 시킬려고 했는데 형님들과 신료(臣僚)들이 적극 구명운동(救命運動)을 하여 귀양을 갔으며, 조선조(朝鮮朝) 유림(儒林)들로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던 분이다.

필자가 족보의 기록을 살펴보니, 고려 말기에 벼슬의 호칭이 너무 자주 변경되어 후손들이 선조(先祖) 분들의 벼슬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변경했고, 공민왕(恭愍王) 때 전법판서는 형부상서로 호칭이 환원되었다.

 

공민왕 11년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판도판서(版圖判書)로 변경하였는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판도판서는 다시 호부상서가 되었다.

 

10世 鄭習常, 習忠, 習仁 3형제의 증조부 7世 양평공(良平公) 정승(鄭丞)이 형부상서 및 호부상서, 조부 8世 경렬공(景烈公) 정방주(鄭邦柱)가 형부상서를 역임하였고, 鄭邦柱의 장남(9世 鄭公佑)과 차남(鄭公衍)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3남 강헌공(康憲公) 정공신(鄭公愼)이 고려말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다가 조선 초에 호조전서(戶曹典書, 태종 5년에 戶曹典書를 호조판서'戶曹判書'로 호칭 변경)를 역임한 후에, 鄭公愼의 조카 鄭習忠의 아들인 11世 정순(鄭恂, 필자의 先祖)이 곧 이어 戶曹典書를 역임했다.

 

鄭恂의 아들 12世 정승적(鄭承積, 필자의 先祖)이 세종, 문종조에 호조 참판(戶曹 參判)을 역임한 걸로 보면 필자의 선조 분들이 조선 초기에 호조(戶曹)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항렬(行列, 돌림자)은 각 분파마다 다 다르고, 같은 분파내에서도 같지 않음을 필자가 확인하였다.


우리 집안을 예로 들면, 필자는 박사공파 내에서 장양공파(莊襄公派)이다.
28世 鄭0善(선) - 29世 鄭鎬(호)0 - 30世 鄭0洪(홍) - 31世 鄭東(동)0 - 32世 鄭秀(수)0 - 33世 鄭0爀(혁)

 

필자는 30世로 洪자가 돌림인데, 족보명과 호적명이 다르다.
4형제 중 2명은 족보명과 호적명이 일치하고, 2명은 다르다.

자기 분파를 잘 모르는 분들은 종손(宗孫) 집안인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의 통일 항렬을 따르면 된다.

 

참고로 필자의 선조(先祖)인 13世 장양공(莊襄公) 정준(鄭俊, 鄭承積의 아들, 草溪君, ?∼1467)은 온성절제사(穩城節制使), 영흥부사(永興府使), 호분위대호군(虎賁衛大護軍), 자선대부(資善大夫)를 역임한 무신(武臣)이며, 주로 여진족을 방어하고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있는 신계서원(新溪書院)이 莊襄公 鄭俊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근세(近世)의 초계 정씨 유명인으로는 정계선(헌법재판관), 정명조(전 천주교 부산교구 교구장), 정범구(전 국회의원), 정영환(한국법학교수회 회장), 정용후(전 공군참모총장), 정우성(연예인), 정우식(전 국회의원), 정유섭(전 국회의원), 정현백(전 여성가족부 장관), 정호섭(전 해군참모총장), 정황(전 롯데칠성음료 대표이사) 등이 있다.


2世 貞簡公 鄭文은 후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世襲忠孝 家傳淸白(세습충효 가전청백)
대대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집안은 청아하고 담백하게 관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