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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신 안동 김씨(安東 金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안동김씨 대종중 http://www.adkim.net
신 안동김씨(安東金氏)는 2015년(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 현재 53,183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148위이다.
신 안동김씨는 후(後) 안동김씨라고도 하며,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이다.
金宣平은 고려의 개국공신이고, 중시조는 김습돈(金習敦)이다.
조선말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김씨가 바로 신 안동김씨이며, 특히 세도정치와 관련된 분파를 장동 김씨(壯洞 金氏)라고 한다.
경복궁 근처 장의동에 거주하면서 세도를 누리던 김상헌(金尙憲)의 후손들은 "장동 김씨(壯洞 金氏)"라고 자칭하면서 자신들을 다른 신 안동김씨들과 구분했다.
족보에 따르면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효공왕(孝恭王)의 아들인데 효공왕이 붕어(崩御)했을 당시 11세의 나이라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고 한다.
926년(경애왕 3년) 김선평(金宣平)이 고창의 성주(城主)로 부임했고, 930년(고려 태조 13년) 왕건(王建)을 돕기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고창군(高昌郡)에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견훤(甄萱)의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그 전공으로 고려 개국공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고창군(古昌郡)은 안동부(安東付)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현재 안동(安東)은 김선평에 의해서 개칭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부(亞父)라는 것은 고려의 황제 왕건(王建)이 김선평(金宣平) 태사를 존경해서 “아버지에 버금간다”라고 해서 버금 아(亞), 아비 부(父)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의하면 王建은 金宣平을 스승처럼 대우했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에는 이들 3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을 제향하는 태사묘(太師廟)가 남아 있으며, 약 1000년동안 金(김), 權(권), 張(장) 3姓氏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신 안동김씨는 김선평과 김습돈 사이의 대수(약250년, 7~8대)를 확인할 수 없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 이전(以前)은 산소의 위치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신 안동김씨가 기가(起家)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淸陰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 때였다. 金得雨는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전농정(典農正)을 지냈으며, 풍산류씨 류난옥(柳蘭玉)의 손녀사위가 됨으로써 풍산류씨와의 세의(世誼 : 대대로 사귀는 情)를 확보하게 된다.
류난옥은 바로 선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풍원 부원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대조이다. 金得雨는 안동권씨 권희정(權希正)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가문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게 된다.
金得雨는 권희정(權希正)의 딸을 외아들 김혁(金革)의 아내로 삼았는데, 권희정은 세종조에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의 아버지였다.
더욱이 金得雨는 權軫을 사위로 삼음으로서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는 연혼, 중혼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은 안동김씨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 안동김씨는 고려시대 이래로 단 한 명의 문과(대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사위이기는 하지만 권진(權軫, 1357~1435)이 문과를 통해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그 반사적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통혼의 과정에서 金革은 배상지(裵尙志), 이운후(李云候)와 동서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배상지(裵尙志, 1351~1414)는 고려말의 은사로서 서애 류성룡은 그를 두고 “상설처럼 맑고 옥처럼 정갈하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고절을 지킨 선비”로 평가하였다.
그의 5세손 배상룡(裵尙龍)은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7세손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은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로서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裵三益의 계열은 조선 후기 안동의 대표적인 명망 가문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이운후(李云候)는 바로 퇴계 이황의 고조부로서 진성이씨(眞城李氏, 진보이씨 眞寶李氏)의 예안 입향조였다. 이처럼 신 안동김씨는 혼인을 통해 안동 굴지의 명가들과 연결되었는데, 이는 곧 문호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신 안동김씨는 김득우(金得雨), 김혁(金革), 김삼근(金三近)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우선 김득우, 김혁 부자는 시조 이래 450년 세거지인 안동의 강정촌(江亭村, 현재 안동시 정상동 귀래정 부근)을 떠나 풍산현의 불정촌(佛頂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들의 풍산 이거(移居)는 처가이며 외가인 풍산류씨(豊山柳氏)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풍산현 불정촌(안동시 풍산읍 하리리)도 신 안동김씨의 영원한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김득우의 손자 김삼근(金三近, 1390~1465) 대에 이르러 인근의 소요산(素耀山)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소요산은 풍산현의 치소와 5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원래의 명칭은 금산촌(金山村=소산리)이었다.
김삼근의 입거(入居)를 계기로 풍산 소산은 신 안동김씨의 백세 터전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재 안동에서는 이들을 소산 김씨(素山 金氏)로 부르고 있으며, 신 안동김씨 11개파 모두 素山에서 분파된 가문들이다.
김삼근이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풍산읍 하리리)에서 풍산현 소산리(금산촌)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1430년(세종 12년) 전후로 짐작된다. 이주와 동시에 제택(第宅 : 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립하여 정착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자질(子姪; 자식과 조카)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신 안동김씨는 무려 550년 만에 비로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김삼근에게는 김계권(金係權), 김계행(金係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차남 김계행(金係行)이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까지 올랐으며 청백(淸白)을 傳家之至寶로 삼아 향리에서는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고 칭송하였다.
말년에는 안동부(安東府) 길안(吉安) 묵계(墨溪)로 이주(첫 부인을 사별한 후 24세 때 의령남씨 남상치의 차녀와 재혼하였는데, 남상치는 사헌부 지평 및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으며 도덕과 문장이 뛰어났다. 계유정난때 단종이 폐위되자 한양에서 안동으로 낙향하여 길안 거묵역 - 거묵동, 묵촌, 묵계에 쌍청헌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아들이 없어 후일 사위인 김계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내외 묘사를 당부함)했다.
金係行의 가계는 신 안동김씨 중에서도 보백당파(寶白堂派) 또는 정헌공파(定獻公派)로 불리고 있다.
김계행의 문과(대과)급제는 신 안동김씨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 김삼근이 득성 이래 최초의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였다면, 그는 최초의 문과(文科) 합격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 안동김씨는 김계행을 통해 과거의 문턱을 넘음으로서 향반(鄕班)에서 점차 도반(道班), 국반(國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계행은 장동김씨의 직계 조상은 아니었다. 장동김씨(壯洞金氏)의 선대가 과거를 통해 출사하기까지는 이로부터 2대(김영, 김번 형제의 문과 급제)를 더 기다려야 했다.
청음(김상헌)의 5대조 김계권(1410~1458)은 과거 출신이 아닌 관계로 벼슬이 한성부 판관(종5품)에 그쳤지만, 그는 예천권씨(醴泉權氏) 권맹손(權孟孫)의 사위가 됨으로써 자식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권맹손(權孟孫, 1390~1456)은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세종조의 문병(文柄 : 學文과 文治상의 권리)을 좌우하였으며, 태재(泰齋) 류방선(柳方善, 1388~1443)과 같은 문사와의 교유도 깊었다.
한편, 김계권은 5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세조의 국사(國師)를 지낸 학조대사(學組大師), 둘째 김영전(金永詮)은 사헌부감찰, 셋째 김영균(金永勻)은 진사, 넷째 김영추(金永錘)는 수원부사, 다섯째 김영수(金永銖)는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다섯째 사헌부장령 金永銖는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영(金瑛)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둘째 김번(金璠)도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 셋째 김순(金珣)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형조좌랑을 지냈다.
평양서윤을 역임한 김번(金璠)의 후손들이 신 안동김씨 서윤공파로 분파하였는데,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장동 김씨(壯洞 金氏)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의 청풍계(淸風溪)와 장의동(壯義洞)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金璠의 후손들은 왕비 3명, 후궁 1명, 부마도위 2명, 종묘공신 6명, 판서 35명, 당상관(정3품 이상) 140여명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김계권의 5대손이자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헌(金尙憲)이 인조 때에 왕실의 외척이 되면서 조선 말기에 권력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세도정치를 통하여 60년간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종친의 권력을 유지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3명의 왕비 곧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哲仁王后)를 왕들과 혼인시켰다. 가문을 사칭하는 백성을 능지형에 처해 가문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극소수 정예 가문이 되었다.
김창집의 증조부 김상헌에 이르러 그들의 가문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상헌은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 남문루에서 분신하였고, 척화항전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또한 김상헌은 1639년에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압송되어 6년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대로(大老)로 인정받으며 북벌의 상징적 인물로 숭앙되었으나, 양주의 석실촌(石室村)에 은거하였다.
장동 김씨(壯洞 金氏)는 노론에 합류하였는데, 김수증(金壽增),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은 장동 김씨 가문을 노론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충청의 산림 송시열·송준길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현종조의 예송논쟁·숙종조의 환국기를 지나며 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1674년의 갑인예송 때에는 춘천과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에는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가며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1689년의 기사환국에 즈음하여 유배 후 사사(賜死)라는 파란을 겪는다.
김창집은 노론 4대신으로 경종에 의해서 성주에서 사사되었으나, 동생인 김창협과 김창흡은 학문과 문장에서 뛰어났고 그 후손들과 사위, 제자들은 학맥, 혼맥으로 얽히며 장동 김씨는 최고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다.
이후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김조순(金祖淳)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의 5대조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신 안동김씨는 조선을 망하게 한 귀족 가문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 재상, 학자가 많다.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에 일찌기 가문이 융성하게 된 것이다.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도 실록을 보면 관서 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 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신 안동김씨를 이끌던 시기는 전횡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김조순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아들인 김좌근(金左根)과 양손자인 김병기, 또 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세도정치를 하면서 모두가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일합방에 협력한 공으로 신 안동김씨는 8명이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를 얻었다.
신 안동김씨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다. 천주교 박해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왕후(定順王后)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신 안동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를 박해할 이유가 없었다.
근세(近世)의 신 안동 김씨(安東 金氏) 유명인으로는 김모임(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무연(전 부산시장), 김민지(박지성 부인), 김범일(전 대구광역시장), 김성진(전 문화공보부 장관), 김수한(전 국회의장), 김엽(전 안동대학교 총장), 김옥숙(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원기(Shawn Kim, 연예인), 김을동(전 국회의원), 김인기(전 공군 참모총장), 김창동(프로게이머), 김형동(국회의원), 김혜경(이재명 민주당 당대표의 부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