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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夽甲 2024. 10. 5. 20:35

유명인들의 인명별 영어 명언 https://cw2588.blogspot.com

 

 

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제주 고씨(濟州 高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주 고씨(濟州 高氏)2015(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 현재 310,542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32위이다.

 

* 제주고씨 대동보(大同譜) http://www.jejuko.net

 

濟州 髙氏의 시조는 탐라 개국설화에 등장하는 고을나(髙乙那)이다.

 

제주도에는 본래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三神)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짐승을 사냥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동쪽에서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 와서 열어 보니 그 속에는 미녀 세 명과 곡식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이 미녀 세 명을 각각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중 고을나가 제주 고씨(濟州高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내력 때문에 제주 고씨와 양씨, 부씨는 서로 먼 친척으로 간주한다.

 

탐라 역사는 제주 3()이 철기를 가지고 이주해 온 철기시대부터이며, 초기에는 고구려와만 사신 왕래를 하였고, 왕이라는 뜻의 '을나(乙那)'가 북방민족 언어로 대족장이라는 뜻이어서 삼성혈(三姓穴), 삼족오(三足烏)처럼 3을 신성시 여기는 부여계 고구려와 같은 고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조선 초까지 왕위직을 유지했기 때문에 1500년 이상 왕조를 유지했다.

 

제주 삼성혈(三姓穴)은 삼을나(三乙那)의 탄생지로 매년 춘추제(春秋祭) 및 건시제(乾始祭)를 봉향하고 있으며, 벽랑국에서 보내온 삼공주와 혼인했다는 혼인지(婚姻址)가 지금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남아있다.

 

고을나의 15세손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세 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 : 전라남도 강진군)에 이르렀고, 신라에 내조(來朝)하여 고후는 성주(星主), 고청은 왕자(王子), 고계는 도내(徒內)라는 칭호를 받았다. 처음 왔을 때 탐진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탐라(耽羅)라는 국호(國號)를 받았다.

 

고을나(髙乙那)45세손인 탐라국왕(耽羅國王) 고자견(髙自堅)의 아들 고말로(髙末老)가 고려에 내조(來朝)하여 태조에게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받았다.

 

髙末老의 세 아들인 고유(高維), 고강(高綱), 고소(高紹)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시조에서 45세손 자견왕까지 탐라 군주로 세습해 오다가 46세손인 髙末老가 고려에 입조하여 그가 곧 모든 탐라계 고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주가 대종(大宗)이며 髙末老의 증손자 고공익, 髙末老의 증손자 고영신(개성), 髙末老10세손 고중연(장흥), 髙末老의 후손 고종필(연안), 髙末老16세손 고응섭(안동)을 중시조로 하는 등 15개의 본관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髙末老의 직계손 만이 제주도에 남아 성주(탐라의 지배자) 자리를 세습하고 나머지 후손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고려의 각지에 정착해서 새 본관의 중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본관이 다양하게 늘어났던 것이다.

 

최근에는 각 본관의 고씨들이 서로 같은 혈손이라며 다시 합본하여 고을나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제주로 하여 '제주 고씨 중앙종문회'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장흥을 본관으로 하는 장흥 고씨는 이제는 제주 고씨 장흥백파로 명명하고 있다. 이런 역사는 제주 고씨의 각 파의 인구분포에도 반영되었다.

 

제주도에 사는 고씨의 대부분은 조선시대까지 섬에 남은 자들의 후손인 성주공파, 전서공파, 영곡공파이다. 반면에 육지에 사는 고씨 중에서는 중시조가 고려나 조선에서 벼슬을 받은 경우인 장흥백파, 양경공파, 영곡공파의 비율이 높다.

 

탐라계 고씨는 국내에 2015년 기준으로 461,373명이 살고 있으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김씨와 이씨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이 중 본관이 제주로 등록된 고씨는 67%뿐이며, 25%는 본관이 제주로 등록되지 않은 제주 고씨 장흥백파이고 나머지 8%도 다양한 본관으로 등록된 제주 고씨이다.

 

국가에서 집계한 제주 고씨 중에서는 영곡공파가 20%로 가장 많으며, 탐라계 고씨 전체에서는 13%를 차지한다.

 

제주 고씨 종친회에서는 성씨를 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위 한자는 인명용 한자가 아니라서 젊은 고씨들은 대개 를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주민등록등본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때때로 아버지와 자녀가 쓰는 한자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주요 종파로는 성주공파(星主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영곡공파(靈谷公派문충공파(文忠公派장흥백파(長興伯派화전군파(花田君派문정공파(文禎公派상당군파(上黨君派양경공파(良敬公派) 등이 있다.

 

성주공파, 전서공파, 영곡공파는 각각 중시조 고말로의 10세손 고인단, 13세손 고신걸, 15세손 고득종을 파조로 두고 있다.

 

그러나 혈연관계로 보았을 때 이들은 모두 중시조 13세손이자 16대 성주였던 고신걸의 후손이다. 당시에 이 집안은 다른 친척들이 일찍이 고려로 이주하는 동안 성주 자리를 세습하며 계속 제주도에 남아있었다.

 

족보상으로는 성주공파가 초대 성주 고말로의 장자 직계이지만 이름과는 달리 성주공파의 고말로 15세손 고득남은 마지막 성주인 14세손 고봉례의 직계가 아니다.

 

족보상으로 고득남은 15대 성주 고명걸의 직계인데, 당시 시대는 원나라가 망하던 여말선초의 혼란기였으며, 심지어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 성주까지 죽이겠다고 날뛰자 고명걸은 성주 자리를 사촌 동생 고신걸에게 넘기고 숲속에 은거하였다.

 

그 후 고신걸은 성주 자리를 자신의 셋째 아들인 고봉례에게 물려주었으며 심지어 고명걸의 아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고말로의 장자계통의 대가 끊긴 셈이 되었다.

 

그래서 고신걸의 손자인 고득남을 고명걸의 손자로 입양시켜서 대를 잇게 하였고 그 후손이 성주공파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고득남의 출계 처리는 고득남의 세대나 그보다 훨씬 후대에에서야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씨의 계보를 최초로 문서화한 '성주고씨가전'이나 '장흥고씨가전'은 고득남과 같은 세대인 고득종이 관여해서 작성되었으며, 그 이전까지 고씨 집안은 '가문의 계보'라는 유교적인 개념을 접하지 못한 듯하다.

 

애초에 조상을 공경하기 위해 매장하여 봉분을 만드는 유교식 장법을 제주도에 최초로 도입한 것도 고득종이었고, 당시의 다른 탐라인들은 고유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고득남 이외의 나머지 고신걸의 손자들은 전서공파로 분파되었다. 이전 세대까지 탐라의 성주는 탐라를 다스리면서도 고려나 조선의 수도에서 자주 지내면서 본토의 권력층과 교류해왔는데, 당시에 마지막 성주 고봉례가 성주직을 조정에 반납하고 탐라가 조선의 통치체제에 편입되면서 고신걸의 손자 세대는 더이상 지방 토호로서는 중앙 정계와 연이 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는 제주도의 토호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신걸의 손자 고득종은 다시 전서공파에서 갈라져 나와 영곡공파의 파조가 된다.

 

고득종은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문과에 급제해서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 이질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에 기반을 둔 영곡공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현대에는 제주도에서 성주공파와 전서공파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영곡공파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장흥백파

제주 고씨에서 가장 메이저 파인 장흥백파는 제주 고씨 1세조 고말로(高末老)10세손 고중연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진 데 그 기원이 있다.

 

장흥 고씨, 장택 고씨, 창평 고씨로 본관을 써왔으며 현대에 제주 고씨 장흥백파로 합본되었으나, 2015년까지도 장흥/장택 본관을 사용하는 인구가 탐라계 고씨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유명한 장흥백파 출신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이 있다.

 

양경공파

양경공파는 중시조 고말로의 증손 고영신을 시조로 하는 개성 고씨가 제주 고씨로 합본한 파이다. 아직 개성 본관을 유지하는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탐라계 고씨의 4%를 차지한다. 양경공파는 조선시대에 학자와 문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 고영(高瑛)의 아들인 고사경(高士褧)은 고려 말에 상서(尙書), 조선 초기에 보문각 직제학을 지내고 김지(金祗) 등과 함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이두(吏讀)로 편찬하였다.

 

문충공파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문충공(文忠公) 고경(高慶)의 고조부(高祖父)인 고돈겸(高惇謙) 이래로 세거해온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전북ㆍ경기ㆍ강원도ㆍ충청도ㆍ경상도 일원에 많이 살았으며, 그중 일부는 19세 고종필(高宗弼) ㆍ 고몽필(高夢弼)의 대를 전후하여 황해도 연백(延白)으로 옮겨가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에 있던 고돈겸(高惇謙)12세기 중엽에 중앙의 관리로 있다가 모함을 받고 옥구현(현 전라북도 군산시 오식도동)으로 유배되어 거주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옥구에 터를 잡고 세거하였다.

 

 

근세(近世)의 제주 고씨(濟州 高氏) 유명인으로는 고건(전 국무총리), 고경표(연예인), 고두심(연예인), 고민정(전 국회의원), 고소영(연예인), 고승덕(변호사), 고아라(연예인), 고정식(전 특허청장), 고창섭(충북대학교 총장), 고현정(연예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