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송씨(礪山 宋氏) 도시조 송주은(宋柱殷) 시조 송유익(宋惟翊) 중시조 송송례(宋松禮) 조상 본 본관 인구수 순위 뜻 한자 한문 유명인 인물 파 종류 여산송씨 원윤공파(元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 정경부인(貞敬夫人) 송씨 아버지 송질(宋軼) 남편 홍언필(洪彦弼) 아들 홍섬(洪暹) 모두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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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국의 성씨 본관별 현황(가나다 순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683613 , 전체 순위 https://blog.naver.com/starlive33/223593727020 )을 정리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는 려산 송씨를 포함하여 2015년(15년마다 실시되는데, 총조사 실시 10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에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예정) 현재 298,231명으로 본관별 인구수 33위이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을 본관으로 하는데, 여산(礪山)은 익산시 여산면 일대의 지명이다.
여산(礪山)은 전북 익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 두 현(縣)의 합명(合名)이다.
원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하였고, 1396년(조선 태조 5)에 낭산현(朗山縣)을 병합하였으며, 1399년(정종 2)에 여산현(礪山縣)이라 개칭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여산군으로 승격되었고, 1699년(숙종 25) 여산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고, 1914년 여산면 등 5개 면이 익산시에 편입되었다.
송씨(宋氏)의 도시조(都始祖)는 당(唐)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이며,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하는 여산 송씨(礪山宋氏), 차남 송천익(宋天翊)의 후손에서 은진군(恩津君)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하는 은진 송씨(恩津宋氏), 3남 송문익(宋文翊)을 시조로 하는 서산 송씨(瑞山宋氏)가 있다.
그 외 진천(鎭川), 신평(新平), 야성(冶城)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은진·진천 송씨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현존하는 모든 송씨는 도시조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여산 송씨는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진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宋惟翊의 아들 송숙문(宋淑文)이 고려 원종(元宗)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고 한다. 증손 송송례(宋松禮, 1207~1289)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부원수 홍다구와 함께 충렬왕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상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손자 대에 와서 개성 원윤(開城元尹)을 지낸 송운을 파조(派租)로 하는 원윤공파(元尹公派), 밀직부사를 지낸 송방영(宋邦英)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윤을 지낸 송원미(宋元美)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지신사를 지낸 송인(宋璘)을 파조로 하는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 송서(宋瑞)를 파조로 하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등 크게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開城元尹 송운의 6세손 송간(宋侃)이 세종과 단종 대에 걸쳐 형조 참판을 지냈고, 왕명으로 호남을 순무(巡撫)하고 돌아와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영월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고향인 여산에서 은거하였다.
단종이 시해되자 산속으로 들어가 애곡하여 복상한 충신인 팔절(八節)로 일컬어졌으며 동학사(東鶴寺)의 초혼각(招魂閣), 운곡서원(雲谷書院) 숙모전(肅慕殿), 세충사(世忠사)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송방영(宋邦英)의 차남 대광첨의(大匡僉議) 송표(宋標)는 아들로 송유경(宋有敬)과 송유신(宋有信)을 두었는데, 장남 송유경(宋有敬)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유충(有忠)이라는 사명과 함께 청원군(淸原君)에 훈봉되어 청주 송씨의 시조가 되었다.
송유충(宋有忠)의 아들 송훤(宋暄)은 서원군(西原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청백편(淸白篇)에 책록되었다.
송훤(宋暄)의 아들 송승은(宋承殷)은 단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으며, 계유정난 때 남하하여 김해에 은거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김해에 정착하여 대를 이었다.
송유충의 8세손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때 조선 최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공이 인정되어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증직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추증되었다.
송빈의 아들 송정백(宋廷伯)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영남 일대의 전투에서 여러 공적을 세운다.
宋賓의 아우 송관(宋寬), 송우(宋宇), 송주(宋宙)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창녕성에서 분전하다 순절하는 등 충절(忠節)의 가문을 이루었다.
도첨의 좌찬성(都僉議左贊成) 송원미(宋元美)의 현손으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한 송극창(宋克昌)의 아들 송천희(宋千喜)는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군수(郡守) 송연손(宋演孫)은 지신사 송인의 6세손인데 연산군 때 알성시에 급제한 그의 아들 송세림(送世林)은 중종 때 능성 현령으로 재직중 이도쇄신(吏道刷新)과 지방행정의 개혁을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문장과 그림·글씨에 모두 뛰어났고 어면순(禦眠楯)을 저술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의 아우 송세형도 학행이 뛰어나서 유명세를 펼쳤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대사헌과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송세형의 손자 송여종(宋汝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안 군수 신호(申浩)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이순신을 따라 종군하여 휘하 군관으로 크게 활약했는데, 한산도 대첩에서 무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으로 경상좌도 수군우후(慶尙左道水軍虞侯)를 지냈다.
지신사(知申事) 송인(宋璘)의 6세손 송현수(宋玹壽)는 지중추부사 송복원의 아들이다, 딸이 단종비(端宗妃)로 책봉되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라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한편 공민왕 때 우정승(右政丞)으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진 송서(宋瑞)의 7세손 송질(宋軼, 1454~1520)은 도정 송공손(宋恭孫)의 아들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송질(宋軼, 1454~1520)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송씨는 아버지 宋軼, 남편 홍언필(洪彦弼, 1476~1549), 아들 홍섬(洪暹, 1504~1585)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으며, 본인은 94세까지 장수하였다.
宋軼의 손자 송인(宋寅)은 중종의 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혼인하여 여성위(礪城慰)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에 봉해졌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나 당대의 석학 이황, 이민구, 정염, 이이, 성혼 등과 더불어 교유하며 문명을 떨쳤고, 만년에는 선조(宣祖)의 자문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호필(湖筆)의 산지(産地)인 중국 오흥(吳興)의 필법을 본받아 특출한 서법으로 해서(楷書)에 능했으며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현판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짓고 썼다.
송익필은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으며 팔문장가(八文章家)로 꼽혔다. 형제 송부필 송한필도 모두 문장에 능했으며 율곡은 ‘성리학을 함께 논할 만한 사람은 익필과 한필 형제 뿐이다’ 라고 평했다.
만년에 구봉산(龜峰山)에 은거한 송익필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서성, 정홍명(鄭弘溟), 김반 등을 배출했고 그의 학통은 이율곡과 더불어 조선 예학의 종주를 이룬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웠던 송순례(宋純禮)는 현감 송옥손(宋玉孫)의 아들로 외적의 침입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악비(岳飛)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받고 제주 목사와 전라도 방어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송홍연(宋弘淵)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송상현은 감사를 지낸 송익손의 현손이자 현감 송복흥(宋復興)의 아들인데 선조 때 문과급제해서 호조 예조 공조 정랑을 거쳐 사재감(司宰監)과 통정대부를 지내고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그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송상현의 아우 송상인(宋象仁)은 직강(直講)과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현감 송관(宋寬)의 아들 송대립(宋大立)은 정유재란 때 창의별장(倡義別將)으로 권율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그의 아우 송희립(宋希立)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다대포 첨절제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삼형제는 모두 임란때 공을 세운 임란 공신이다.
원주 목사 송시철(宋時喆)의 손자로 숙종 때 등과하여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송징은(宋徵慇)은 박학하고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약헌집(約軒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아들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숙종 때 송수찬(宋修撰)은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승지가 되어 정치의 득실을 상소했던 송성명(宋成明)은 영조 대에 실록청 당상으로 숙종실록에 참여하고 예문관 제학과 공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며, 문장에 능하여 저서로 송석헌집을 남겼다.
그의 아우 송진명(宋眞明)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3도의 관찰사와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올랐으며, 학행과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이조참판 송징오(宋徵五)의 아들 송인명(宋寅明)은 숙종 45년 문과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거쳐 설서(設書)로 있으면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어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 추진했고, 왕명으로 감란록(勘亂錄)을 편찬하였다.
대사헌 송성명(宋成明)의 아들 송익보(宋翼輔)는 영조 때 서로방략(西路方略)과 군민(軍民)에 관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명성을 떨쳤고, 송문재(宋文載)는 영조 때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으며, 판중추부사 송창명(宋昌明)의 손자 송면재(宋冕載)는 순조 때 정조부사(正朝副使) 한성부판윤과 대사헌을 거쳐 예조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헌종 때 기로소(耆老所)에 추증되었다.
4세 송송례(宋松禮)의 아들인 송염(宋琰)과 송분(宋玢) 형제에서 원윤공파(元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 등으로 파가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5세 송염(宋琰)
6세 송운(宋惲): 원윤공파(元尹公派)
6세 송방영(宋邦英): 밀직공파(密直公派)
6세 송원미(宋元美): 소윤공파(小尹公派)
5세 송분(宋玢)
6세 송린(宋璘): 지신공파(知申公派)
6세 송서(宋瑞): 정가공파(正嘉公派)
근세(近世)의 여산 송씨(礪山 宋氏) 유명인으로는 송갑석(전 국회의원), 송강(연예인), 송기숙(소설가), 송기윤(연예인), 송기헌(국회의원), 송도균(전 SBS 대표), 송대관(가수), 송도순(성우), 송두환(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송범근(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송병구(프로게이머), 송삼석(모나미 명예회장), 송월주(전 조계종 총무원장), 송은이(연예인), 송혜교(연예인) 등이 있다.